2020 10 vol.132 Webzine

강원도여성가족연구원 웹진여성ⓔ행복한 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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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새로운 문화가 될 포스트 코로나의 명절, 가족

한국여성수련원 원장 / 유현옥
사진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기혼 여성들이 과중한 명절 노동을 힘들어하니 음식을 함께 만들고 시댁과 친정을 고루 다녀오자는 것을 캠페인을 벌였던 것이 2000년대 초반인 듯하다. 거기에 적극 참여했던 기억이 명절이 되면 떠오른다.
그리고 20년쯤 흐른 지금, 우리의 가정은 어떤 모습일까?
1인 가구가 늘어나고, 가족의 모습은 자꾸 분화되어간다. 나도 직장 탓으로 3년간을 1인 가구로 살았다. 독립된 가구를 이루어 살면서 가정과 가족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 한마디 없이 소파에 널브러져 텔레비전을 보던 동거인(남편)의 존재가 새삼스러웠고,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요구 탓인지 혼자 중얼거림도 제법 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우리는 혼인을 매개로 한 가족문화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가족의 규모가 점점 줄어드는 데다 코로나19로 인해 가족의 만남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나의 직계가족인 아이는 중국에 있어서 얼굴을 본지가 1년이 넘었다.
예년에는 서울 큰집에서 시댁 가족과 만나 제사를 지내고 아침을 함께 나눈 뒤, 저녁에는 친정에서 모이는 것이 우리 가족의 명절 풍경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그나마도 만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제사 풍습이 없는 데다 아버지가 실향민이셨던 친정의가족은 명절이라야 외가쪽 몇 집을 빼고는 갈 데가 없어 늘 외로웠다. 그래서 신혼 초 시댁에 식구들이 북적거리는 게 좋았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북적거림에는 여성들의 심한 가사노동이 공존한다. 2명의 형님들, 그리고 사촌 동서들이 전날부터 전을 지지고, 나물을 만들고 하는 음식준비가 뒤따랐다. 내 큰 형님도 직장을 다녔는데 이런저런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하고 박카스를 먹어가며 명절음식을 진두지휘했다. 이런 명절 풍경에서 막내며느리인 내게는 큰 역할이 없었다. 그게 더 힘들었다. 눈치껏 온갖 잔심부름을 해야 하는 처지, 그 눈치가 너무 힘들었다.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내모습이 시댁의 여자들에게는 종종 이야깃거리였다. 그때 내가 제일 부러워한 것은 친척 아주머니가 주방에 붙어서 하는 설거지였다. 음식을 먹고 난 그릇이 개수대에 들어오면 받아서 재빠르게 씻어내는 역할, 이런저런 잡스런 일보다 그게 참 권위있고 우왕좌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어서 좋아 보였으니…….

서울 시댁의 본향은 경상도였다. 그래서 우리끼리 살 때는 집안일을 별로 가리지 않는 남편도 집에 가면 밤을 까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시부모님이 계실 때는 명절 전날 시댁에 갔다. 그러면 남자들은 우르르 당구장에 가거나 산책을 가서 집을 비워주는 것이 무슨 배려인 듯했다.
더욱이 명절 당일의 밥상은 나를 무척 혼란스럽게 했다. 좁은 집에 일가친척이 수십 명 모이면 남자 어른들의 밥상 먼저, 그다음 아이들의 밥상 순으로 상차림이 끝나야 그 마지막 밥상에 여자들이 모여 허기를 채우듯 밥을 먹는 것이었다.
이 오랜 문화를 깨기는 불가항력인듯하여 나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가끔 전을 부치다 갓 구운 전으로 맥주 한잔 먹으며 형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우리 며느리에게도 세뱃돈을 달라고 항의하는 수준의 작은 몸짓만 일으켰을 뿐 견고한 관습을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친정과의 문화적 차이, 그리고 나름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참 많은 자괴감을 갖던 시댁문화는 시나브로 변화했다. 친척들은 자녀들이 성장함에 따라 각자의 고향이나 자신의 집에서 명절을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식구가 줄자 모든 식구들이 한 밥상에서 먹기 시작했고 함께 일을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즈음 나는 주방을 차지하여 느긋하게 설거지를 할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이번 명절은 어찌하나 고민하지만 분명 남편은 가야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 있는 아들과는 화상통화로 만족해야 하고, 시댁에서의 명절은 점심까지 함께하며 집안에 눌러있다거나 이집 저집 친척집을 전전하던 관습은 줄어들 것이다. 조상께 간단히 인사드리고 식구들과 한끼 밥을 나누며 나누는 것이 전부가 될 것 같다.
높은 벽을 쉽게 깨지 못하던 명절 문화가 엄청난 변혁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가는 2020년 추석, 제법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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