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vol.133 Web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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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우리 시대의 설문대 할망, 이이효재 선생님

박정희
사진

2015년 5월 15일, 이이효재 선생님은 11번째 제주 설문대할망제의 특별 제관이 되어 죽 한 그릇만 오롯이 놓인 단정한 제단 앞에 섰다.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생명들이 제 맘껏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또한 세월호로 희생된 꽃같은 아이들의 영혼을 보살펴주소서.’

설문대 할망은 제주도의 탄생 신화 속의 주인공이다. 머나먼 옛날, 밑도 끝도 없는 짙은 어둠 속에서 커다란 불기둥들이 솟아오르고, 이승과 저승이 갈라지던 날이었다. 시커먼 연기와 함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망망대해 속에서 거대한 여인 설문대할망이 떠올라 하늘로 우뚝 섰다.

설문대 할망은 어찌나 키가 컸던지 한라산을 베개 삼고 두 다리는 관탈섬에 걸쳐 잠을 잤다. 할망은 아들을 500명이나 두고 있었는데, 기나긴 가뭄과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는 어느 날, 아들들이 식량을 구하러 나가자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그만 죽 솥에 빠져죽고 말았다. 돌아온 아들들은 허겁지겁 유난히 맛있는 죽을 다 먹고서야 솥 바닥에서 어머니의 뼈를 발견했다. 이이효재 선생님은 이 신화처럼 여성친화적인 제주의 문화와 전통을 발견하고 감동했다. 제주로 이주하여 2년을 살고 나니 몸도 마음도 다시 젊어지는 듯했다.

제주할망사진

▲ 한국 여성계와 민주화운동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이효재 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가 2015설문대할망제에서 특별초대제관으로 참여함.

- 출처 : 제주의 소리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으로 선생님은 자신의 일생 전체가 부정되는 듯한 충격에 빠져 사흘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눈물만 쏟았다. 겨우 기운을 차려 평화의 섬에서 기도나 하자며 제주도에 정착했다.
1924년에 일제강점기에서 태어나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는 목사 아버지로 인해 청소년기는 온통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이 철저히 몸에 밸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처녀공출이라고 불렸던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갈까 봐 공포에 떨었던 기억은 칠십이 되어도 잊혀지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여자들에 대한 의문과 부채감이 반세기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해방직후 이화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평생을 함께해 온 친구 윤정옥또한 똑같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민주화 운동이다 여성운동이다 바쁜 이이효재보다 한 술 더 떠 일본군위안부였던 여성들을 찾아 동남아와 일본을 헤매고 있었다.

“해외에 아직도 피눈물을 흘리고 가슴에 한을 품고 돌아오지 못한 여성들이 있는 것을 보면 돌아와서도 숨죽이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살고 있는 여성들이 있을 거야.”

이렇게 해서 찾아낸 피해자들이 239명이었다. 이들과 함께 세계 여성인권운동, 베트남, 우간다, 콩고, 인도네시아 등 전쟁에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을 돕는 운동은 세계 여성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었다.
1997년, 이이효재 선생님은 서울에서의 모든 활동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고향 진해로 내려갔다. 일선에서 물러났으니 자신이 가진 작은 것이나마 고향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문화적으로 척박한 곳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못내 안타까웠던 선생님에게 드디어 기적이 찾아왔다. 2003년 MBC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서 부지만 마련되면 어린이도서관을 지어준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선생님은 곧바로 시장을 찾아갔고 이웃들을 독려하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발로 뛰어 이듬해 진해 기적의 도서관을 개관시켰다.

“모든 것이 결국 사랑이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경험은 고향에 내려와 이곳 여성들과 함께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며 더불어 사랑을 나눈 일이었어요.” 우리시대의 설문대 할망이신 이이효재 선생님께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빈손으로 떠나며 하신 말씀이었다.

이효재선생님 (전)노무현대통령 방문 시 찍은사진

▲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 진해 기적의 도서관 방문

- 출처 : 박정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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